고령산풍주사일주문
소장 장홍대

소장 장홍대

불화가 미술작품이라면 분명 아름다움을 표방한 그림의 일종임은 틀림없으나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불화가 지니고 있는 멋을 추출해낸다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화의 멋에 접근할 수 있는 미술적 소양과 종교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념적인 성격불교의 이념과 교리에 입각하여 중생교화를 주 목적으로 제작된다.
그러므로 불화의 영역과 불교교리와 사상을 주제로 한 성스러운 평면조형예술로서 표현된다. 후불탱화나 후불벽화
등은 본존화의 성격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본존상을 장엄하는 뜻이 더 강하다.
이때 장엄한다는 것은 단순히 ‘꾸민다’는 뜻보다는 종교적인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한다(嚴)’는 의미가 강하다.

대체로 오늘날의 사찰건축에서도 불화들은 불상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법당이나 금당(金堂)의 정면, 혹은 좌우벽에 그려지고 있다. 중요한 주제는 불전(佛傳)과
본생담(本生譚)이며, 그 밖에 현교(顯敎)에서 오는 각종 존상(尊像)과 밀교(密敎)적인 신상들이 다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특유의 민간신앙과 무속적인 것, 선종계열(禪宗系列)
의 고승들을 비롯한 국사(國師)들의 초상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한국
불교가 걸어온 그 간의 과정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미술이 어디까지나 토착적인
미술의 영향권 속에 살아왔음을 알게 한다. 특히 사찰건물의 외벽에 그려진 불화들은
상당부분이 무속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선담(神仙譚)으로 나타나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화의 특성은 결국 경전의 내용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표출하는 데 있다. 불화에 도설되어
있는 여러 존상(尊像)들은 여래를 비롯하여 보살상, 호법신장상 그리고 칠성, 산신,
명부의 시왕에 이르기까지 많은 계층의 여러 존상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다.

즉, 불화가 다양한 여러 존상들을 한 폭에 그리는 특징을 지니지만, 그들 각 존상들은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연한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의 색감,
크기, 위치 등을 배정하여 우주의 전체상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탱화
풍주사 500동자

불화에도 역사적인 변천이 있었다. 화법상으로 보면 주존상(主尊像)의 표현은 시대가
내려갈수록 그 이전의 적정한 대소비차(大小比差)를 무시하고 과대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또 묘선(描線)에서도 그 이전의 원숙하고 활달한 필치가 서서히 경직되어
굵어지는 경향이다. 색상(色相)에서는 강희 · 건륭시대에 주조를 이루던 적 · 녹색이 점차
퇴조하면서 급기야 청색으로 바뀌었으며, 설채(設彩)에서도 농채(濃彩)와 담채(淡彩)의
구분이 분명했던 것에서 점차 일률적인 것으로 바뀌어 화면이 매우 두텁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불화가 점차 회화적인 격조를 잃어가는 현상이며, 더불어 불화작가들의
품격이 점차 저질화되어감을 뜻한다.

불교미술은 회향(回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회향이란 성취한 목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없이 자기자신만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많은 중생을 보다 효과적으로 극락의 세계로 이끌게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면 불교미술은 예배의 대상이라는 대전제가 있어야하지만 그것은 무조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참회함에 의하여 찬탄의 대상을 발견할수 있게
되고 나아가 그같은 안목을 더욱 확대하여 관찰의 힘을 충분히 발휘함에 의하여 고통의
세계가 아닌 즐거움의 극치로서의 아름다움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의 세계는 자신만을 즐겁게하는 것이 아니라 뭇 중생을 모두 즐겁게
해야한다는 큰 목표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만인에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아름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미술은 뭇 중생을 모두 즐거운 아름다움의 세계로 끌 수 있는 양식과 형식을
지니게되고 그 기법 또한 이상의 다섯가지 조건을 충족시킴에 의하여 고려불교미술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우리는 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불화가
지니는 멋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불화는 보기에 따라서
교화적인 의미를 지니는 관념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지만, 좀 더 그 표현의 세계에 가까이
접하고 보면 죽음의 세계에서 생생한 삶의 세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즉 불화에서는 공간에 실제한다고 생각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할 수 있음이다.

불화의 멋은 무애성(無碍性)에 있다. 비록 한 폭의 화폭을 빌려 불화를 그리지만,
그 그림을 한 폭의 화폭의 그림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이 우주 자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안목을 그 속에 담는다.

저희 현대단청연구소에서는 부처님 경전을 바탕으로 삼아 한국전통불화제작을 기본으로
정성껏 조성해드리고 있습니다. 불화 조성을 발원하고 계시는 사찰 또는 향교나 단체에
직접 찾아뵙고 구체적인 조성견적을 산출해드리겠습니다.

풍주사 500동자